Legato
기억은 언제나 고정된 이미지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풍경을 떠올릴 때조차, 그 장면에 실제로 있었던 것과 이후에 덧붙여진 감정, 다른 시간의 파편들, 타인의 시선까지 함께 불러낸다. 그렇게 하나의 기억은 또 다른 기억을 끌어당기며 끊임없이 형태를 바꾼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나는 기억이 연쇄적으로 파생되는 순간에 주목했다.
전시의 제목인 레가토(Legato)는 음악에서 음과 음을 끊지 않고 부드럽게 연결해 연주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피아노 연주에서 각각의 음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도 앞선 음의 여운을 품은 채 다음으로 이어진다. 나는 이 감각이 화면 속 장면들이 서로를 통과하며 이어지는 방식과 닮아있다고 느꼈다. 기억 또한 단절된 장면들의 나열이 아니라 서로 이어지고 스며들며 끊임없이 변주되는 흐름으로 작동하여 그 안에서 하나의 연속적인 리듬을 형성한다고 생각했다.
하나의 장면을 출발점으로 삼지만, 회화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그 장면은 기록이 아닌 변형의 장이 된다. 형태는 지워지거나 흐려지고, 색은 실제 고유색이 아니라 감정의 밀도로 화면 위에 나타난다. 어떤 부분은 희미해지고, 어떤 부분은 과장되고, 또 어떤 요소는 새롭게 등장한다. 서로 다른 장면처럼 보이는 이미지들은 연상의 방식으로 연결되며, 유사한 구도가 반복되거나 이전 장면에서 등장했던 요소들이 형태를 바꾸어 다시 나타난다. 이러한 요소들은 여러 화면을 가로지르며 떠돌고, 장면들 사이에 정서적인 연결을 만든다.
작업은 산책이나 여행을 하며 촬영한 사진들을 이용한다. 주로 카페와 같은 일상적인 공간에서 비롯된다. 공간은 구체적인 형태보다 기억 속 분위기와 감각을 드러내는 매체로 작용하며, 처음에는 특정한 의미를 갖지 않는 중립적인 배경에 가깝다. 그러나 그곳에 머물렀던 시간과 경험이 더해지면서 하나의 장소로 전환된다. 또한 화면 속에서 식물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요소이다. 식물은 고정된 형태를 갖기보다 자라나고 퍼지며 유동적인 형상을 지닌다. 이러한 존재는 공간 안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여러 장면에 반복되고 기억의 흐름을 이어주는 시각적 단서로 작용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각 화면은 하나의 독립된 이미지이면서도 동시에 다른 장면의 일부를 품고 있는 상태가 된다. 이 겹침은 기억의 작동 방식과 닮아있다. 우리는 하나의 순간을 떠올린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의 파편들이 동시에 겹쳐 떠오른다. 반복되어 나타나는 요소들은 기억의 중첩을 드러내며, 하나의 장면은 다음 장면을 낳고 그다음 장면은 이전 장면의 흔적을 품은 채 다시 이어진다.
이 연쇄 속에서 기억은 과거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현재의 감정과 시선에 의해 계속해서 새로 만들어지는 유동적인 상태로 존재한다. 화면 위에 남겨진 흐릿함과 공백, 계속해서 이어지는 형상들은 불완전한 인지의 흔적이다. 관람자는 각각의 작품 앞에서 단일한 서사를 읽기보다 서로 이어지고 어긋나는 장면들 사이를 오가며 자신의 기억 또한 그 연쇄 안에 겹쳐 놓게 된다. 그렇게 화면 속 장면들은 나의 기억에서 출발하지만, 타인의 기억과 만나는 열린 상태로 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