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사람들은 끊임없이 사진을 찍고 저장하면서 기억을 남기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저장 행위가 기억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억을 대체하는 것은 아닐까? 저장 공간이 부족해질 때마다 우리는 더 많은 사진을 정리하고 새로운 저장 매체를 찾는다. 이는 단순한 데이터 관리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기억을 다루는 방식 자체가 변화했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경험한다는 것은 그 경험을 사진으로 찍는다는 것과 동일해졌다. 경험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것이 곧 그 경험 자체를 의미하게 되면서, 기억은 촬영된 이미지로만 존재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사진의 축적은 오히려 기억을 희미하게 만들기도 한다. 경험의 감각이 사진이라는 물리적 형식에 갇히면서, 감정과 시간성이 사라지고 기록의 나열만 남게 되는 것이다.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는 행위는 기억을 환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일한 장면을 반복해서 소비하게 만든다. 이 반복은 기억의 유일성을 흐리고, 경험의 밀도를 얇게 만든다. 우리는 점차 경험을 스스로 되새기고 내면화하기보다는, 이미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익숙해지고 만단. 그렇게 감정의 결, 순간의 맥락은 사진 바깥으로 밀려나고, 기억은 점차 이미지의 외피 속에서 메말라간다.
기억이 사진으로 축소되고 희미해지는 문제의식에서 나의 작업은 출발한다. 나는 회화를 통해 사진 속 기억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덜어내고 더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감각적 경험으로 변환하고자 한다. 이는 단지 이미지를 다시 그리는 행위가 아니라 사라진 기억의 내면성을 회복하려는 시도이다.
기억을 덜어내는 방식
기억을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고려한 것은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다. 사진 속 형상을 그대로 옮기기보다는,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지거나 희미해지는 기억의 특성을 반영하여, 일부를 지우고 흐리게 표현하였다. 이는 사진이 모든 시각적 정보를 담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실제로 기억되는 것은 일부 요소뿐이라는 점에서 출발한다. 이미지를 선정해 물감을 얹은 다음 블렌딩하여 형상들이 뒤섞이게끔 한다. 이때 흰색 물감을 기반으로 퍼뜨리는데, 흰색 물감이 기존에 있던 물감과 섞여지면서 일차적으로 흐릿하고 모호한 기억의 형상에 다가갈 수 있다. 그리고 사포를 이용해 표면을 갉아 부분적으로 바래진 듯한 느낌을 연출한다. 배경 혹은 대상 간의 색면은 서로 침투되어 경계는 모호해지고 형태들은 뒤섞이게 된다. 보는 이는 화면 속 대상들의 명확한 형태를 먼저 인식하기 앞서 화면 전체를 색의 유동적인 흐름으로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기억을 더하는 방식
반대로, 기억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요소가 덧붙여지면서 변화하기도 한다. 사진은 한순간을 고정하지만, 기억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재구성되며, 감정과 맥락에 따라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회화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기억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작용할 수 있다. 사진 속에 존재하지 않지만, 기억 속에 강하게 남아있는 색감을 덧입혀 이루어진 고채도의 화면과 작업과정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이미지 혹은 비슷한 이미지를 더해 새로운 공간을 연출하게 된다. 최근에는 콜라주를 이용해 문장을 새로 덧대어 고쳐쓰듯이 화면을 연출하는 실험을 하고 있다.